피아니스트 윤철희 리사이틀 ‘The Layers of Time’-세 개의 건반으로 음악의 흐름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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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건반으로 음악의 흐름을 읽다
2026년 3월 17일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한 무대 위에 세 대의 건반악기를 올린다는 발상은 단순한 연출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사를 공간 위에 펼쳐놓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연출이 아닐까? 피아니스트 윤철희의 리사이틀 ‘The Layers of Time’은 바로 그 선언을 실현한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쳄발로, 포르테피아노, 그리고 현대 피아노 등 이 세 악기는 서로 다른 시대의 산물이지만, 이날만큼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관객을 시간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여느 피아니스트들과는 기획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연주회였다.


세 개의 악기, 세 개의 시간


이번 무대는 음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살아온 시간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듣고 있는 피아노 음악은 사실 단일한 악기의 역사 위에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바흐가 들었던 소리, 모차르트가 상상했던 음색, 쇼팽이 구현했던 울림은 모두 서로 다른 악기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차이는 단순한 음색의 차이를 넘어 음악의 구조와 감정, 그리고 표현 방식 자체를 바꾸어왔다. 이 공연은 바로 그 간극을 충분히 드러냈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지 않을까?
무대 위에 놓인 세 대의 악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었다. ‘쳄발로’가 질서와 균형, 그리고 신의 질서 속에 놓인 음악을 대변한다면 ‘포르테피아노’는 인간의 감정이 서서히 음악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순간의 악기이며, ‘현대 피아노’는 감정이 극대화되고 확장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시대의 산물이랄 수 있다. 이 세 악기를 한 무대에 병치(竝置)함으로써, 공연은 자연스럽게 “음악은 어떻게 변해왔는가”라는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제공해나갔다. 물론 피아니스트 윤철희는 이 질문에 대해 언어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연주로 답했다.
“같은 건반을 누르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만지고 있는 것이죠. 이번 음악회에서는 그 차이를 언어 대신 피아니즘을 통해 관객이 직접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는 이번 공연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내는 표현이다. 윤철희의 연주는 단순히 시대별 작품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각 악기가 지닌 물리적 한계와 가능성을 그대로 끌어안으며 그 안에서 음악이 어떻게 다르게 호흡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는 단순한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의 문제이며, 그 점에서 그의 연주는 ‘해석’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존재한다.


유럽 전통 속에서 길어 올린 음악적 사유


그의 음악적 배경을 더듬어보면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무대 경험을 쌓은 그는 서울대를 거쳐 독일 프라이부르크와 트로싱엔 국립음대에서 수학하며 ‘유럽 전통음악’의 정수를 체득했다. Edith Picht-Axenfeld, Vitaly Margulis 등을 사사하며 쌓은 깊이 있는 음악적 사유는 그의 연주 전반에 스며들었고 이는 단순히 ‘피아노 잘 치는 연주자’를 뛰어넘어 ‘음악을 사유하는 연주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음악사의 흐름을 따라가면서도, 단순한 시대 배열을 넘어선 서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5번’은 쳄발로로 연주하며, 바로크 시대 음악이 지닌 구조적 완결성과 균형의 미학을 드러내었다. 음 하나하나는 장식적이면서도 엄격한 질서 속에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더 큰 질서를 드러내는 도구처럼 들렸다.
이어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K.281’과 ‘뒤포르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펼쳐 보였다. 소리는 더 가벼워졌고, 동시에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포르테피아노는 알다시피 완벽한 악기는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더 인간적인 소리라고 할 수 있죠. 그 미묘한 불완전함이 우리의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실제로 그의 터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게 하는’ 방식에 가까웠고, 그 결과 음악은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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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의 끝에서 만난 음악의 정점


후반부에 이르러 현대 피아노가 등장하면서 음악은 또 한 번 확장되었다. 쇼팽의 ‘뱃노래’에서는 유려한 선율이 흐르듯 이어졌고, ‘왈츠’에서는 우아함과 리듬의 긴장이 공존했으며, ‘스케르초’에서는 감정의 폭발과 구조적 긴장이 동시에 드러났다. 이 모든 과정은 현대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압도적인 표현력을 통해 구현되었고, 음악은 더 이상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서사로 완성되었다.
이어진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는 다시금 건반악기의 본질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전예은의 ‘Touch’는 동시대의 감각을 더하며 이 공연이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공연의 진정한 정점은 앙코르에서도 찾아왔다. 앙코르 첫 곡으로 연주된 라흐마니노프의 ‘모멘트 뮤지칼 Op.16 No.4’는 깊고 묵직한 울림으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어 스크랴빈의 ‘왼손을 위한 전주곡과 녹턴 Op.9’이 시작되었을 때, 관객은 비로소 이 공연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한 손으로만 이어지는 선율은 결핍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의 증명이었고, 비어 있는 공간은 오히려 더 넓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윤철희는 이 앙코르에 대해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음악은 부족함이 아니라 집중의 극단입니다. 하나를 덜어낼 때, 음악은 더 깊어진다’고 풀이했다.


소리가 아닌 감각으로 남은 시간


이날 공연을 함께한 한 관객의 반응은 이 경험을 또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마치 위스키를 비교 시음하는 것처럼, 같은 음악을 다른 악기로 들으니 전혀 다른 맛이 느껴졌습니다. 따로 들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차이를 한 자리에서 경험한 느낌이었어요. 특히 포르테피아노로 현대적인 소리를 내다가 다시 모차르트로 돌아오는 순간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약간의 광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어요.”
이 직관적인 표현은 오히려 이 공연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내는 해설에 가까운 소감이다. 음악은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살아난다. 이 공연은 바로 그 감각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이번 공연을 지켜본 류현미 관객의 소감문에서 더욱 깊은 층위로 정리되었다.
“무대 위에는 세 대의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문으로 느껴졌습니다. 쳄발로의 맑고 또렷한 울림은 질서와 신의 숨결이 깃든 시대를 불러왔고, 포르테피아노의 섬세한 호흡은 인간의 감정이 막 깨어나던 순간을 지나, 현대 피아노의 깊고 풍부한 음색은 감정이 세계를 이루는 지점까지 우리들을 데려간 것이에요.”
같은 건반 위에서 서로 다른 시대가 말하고, 같은 손끝에서 서로 다른 언어가 피어나는 순간, 시간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촉각적인 경험으로 변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귀를 통해 만져지는 순간,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감정 사이에 서 있게 된다는 것.
류현미는 특히 포르테피아노로 연주된 모차르트의 첫 악장은 이 공연의 핵심적인 장면으로 남는다고 술회한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 같은 터치는 소리가 아니라 감정의 순간처럼 흩어졌고, 그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마지막, 왼손으로만 이어진 앙코르곡. 한쪽 손이 만들어낸 선율은 오히려 더 넓은 세계를 품고 있었고, 비어 있음이 채움으로 전환되는 순간, 음악은 소리를 넘어 감각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날의 음악회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을 건너는 경험이었고, 음악이 인간의 역사와 감정을 어떻게 품어왔는지를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무대 위에서 흐른 것은, 음악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였다. 피아니스트 윤철희의 시대를 품은 다음 연주 행보가 기대된다.


글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