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기 피아노 리사이틀 (The 9th. Piano Week Ⅱ. Melody) – ‘historic’과 ‘histor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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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3일(목) 7시 30분 달서아트센터 와룡홀


달서아트센터 ‘피아노 위크’ 기획에 관하여


“역사를 잃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나라 잃은 시기에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몇몇 천재적 연주자들의 약진으로 K-콩쿠르, K-클래식이란 단어로 한국 음악계가 주목받고 있는 2020년대이다. 하지만 우리의 음악계 및 청중들, 음악 애호가들은 아직 서양 음악이 이 땅에 정착된 과정 즉 한국의 서양음악사에 대해선 비교적 무관심하다.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서'(1976)을 시발점으로 한국 양악 통사에 대해 기술한 책과 눈문들이 없진 않지만, 다른 주제와 비교하면 아주 드물다. 전공 여부를 막론하고 음악사를 공부할 때 대다수는 ‘서양음악사’에만, 그것도 주로 연주되는 시기인 바로크 이후 낭만주의 음악사에만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풍토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피아노가 유입된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개최되는 대구 달성군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2025년 9월 13번째)와 그와 행보를 함께 하는 달서아트센터 ‘피아노 위크'(2026년 4월 9번째)는 역사적 감각을 지닌, 특별한 기획이다.


지난해 9월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를 듣고 리뷰를 썼다. 2만 청중이 야외에 모여 100대 피아노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관현악 오케스트라를 통해 다양한 장르,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피아노곡으로 소통함으로써, 피아노의 한반도 유입이란 음악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콘서트이다. 작년 9월은 100대 오케스트라를 4파트로 나눠서, 각 파트들을 김정원, 서형민, 손정범, 김홍기 피아니스트가 이끌었다. 음악사적으로 유의미한 콘서트가 단1회 행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쉬웠다. 메인 공연 이외에 네 명의 탁월한 피아니스트들을 비롯한 많은 연주회도 축제 기간 중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청중들의 아쉬움과 희망사항을 이미 알고 있었던 달서구에서는 4일 동안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축제의 마당인 ‘피아노 위크’를 기획하여 달성군의 피아노 축제를 이어 갔다. 4일 동안 총 4회로 구성된 ‘피아노 위크’는 2025년 100대 피아노 파트를 이끌던 김홍기, 손정범 독주회를 중간(2회 멜로디, 3회 하모니)에 두고, 대구 지역 연주자들로 구성된 피아노 학회 회원들의 연주(1회 리듬, 브람스 헝가리 무곡 21)와 피아노 트리오 연주(4회 앙상블)로 구성한다. 음악의 3요소인 리듬, 멜로디, 하모니를 피아노 프로그램을 통해서 재현하고, 타악기와의 앙상블 연주를 통해 피아니스트들의 음악적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또 조화를 조율하는 피아노 악기의 기능적 의미를 청중에게 널리 알리는 기획이다. 100대 피아노 콘서트와 피아노 위크라는 공연 기획만으로도 우리는 피아노 악기의 유입이라는 음악사를 기억하고, 그 이외에 대한민국에서 서양음악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김홍기 피아노 독주회’ 질문하게 하는, 기대하게 하는 연주


음악사는 반역의 역사이다.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는 작곡가들, 남들처럼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음악사에서 단역을 담당할 뿐이다. 당대 ‘피아노의 아버지’로 불리며 베토벤을 능가했고 모차르트와 동급으로 숭상받던 클레멘티는 지금은 그저 기초 소나티네 작곡가로 미미하게 기억되고 있다. 훔멜 모셀레스 마이어베어 등 당대 유행과 대중의 기호에 완벽하게 부합하던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들도 지금은 매니아가 아니면 그들의 존재조차도 모른다.


진정한 예술은 해답이나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끊임없는 질문은 주류에서 탈주한다. 질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주어진 모든 것들, 기존의 권위를 무비판, 무지성으로 추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은 하지 않는다. 수많은 질문을 통해서 해답을 찾는 중 대다수는 자신만의 관점을 확립해 간다. 이는 누구의 음악이 아닌, 자기의 음악으로 표현된다. 청중은 연주회에서 유투브에서 늘 듣던 익숙한 음악의 다른 버전을 들으려고 연주회장을 찾지 않는다.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는 동일한 곡에도 불구하고 저 연주자는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왜 저렇게 연주하는지에 질문을 던지는 연주회를 기대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에 대한 정답이 아닌 해답을 모색한다. 물론 답찾기는 쉽지 않지만, 탐색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몰랐던 자기를 발견한다. 내가 누구인지, 나와 다른 ‘너’는 또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어떠한지를 발견하게 된다. 연주자이든, 작곡가이든 개성과 독창성은 그들의 디폴트, 즉 당연한 전제여야만 한다. 달서 아트 센터의 제9회 피아노 위크의 두번째 연주인 김홍기 피아노 독주회는 그런 의미에서 ‘나’라는 개성과 탁월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피아노 위크’를 기획한 이미연 피아니스트가 곡 전체에 대해 해설을 했다.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인들의 격정적인 서사이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곡으로, 슈베르트 즉흥곡 D.899 No.3번을 짝사랑의 고독하고 슬픔을 자아내는 곡으로 소개했다. 해설자의 개인적인 견해라고 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해석들이었다. 이외 모차르트와 스페인 민족주의(?)를 음악적으로 구현한 그라나도스, 알베니즈의 곡을 설명했다. 그라나도스 ‘고예스카스’에서는 스페인의 댄디들인 마하, 마호의 사랑의 서사를, 알베니스 ‘이베리아’는 스페인 지역을 형상화한 곡임을 청중에게 알려 주었다.


해설 이후 김홍기 피아노 독주회는 총 60분간 인터미션 없이 진행되었다. 연주자는 무대 위에서 한 곡, 혹은 두 곡이 끝나면 인사를 통해 잠시 시간적 틈을 주었을 뿐, 한 호흡으로 끝까지 연주회를 이끌어 갔다. 김홍기 연주는 이미연 피아니스트의 해설 및 일반적인 해석이나 연주와는 상당히 다른, 자신만의 피아노사를 기술했다. 프로그램은 음악사순이 아닌, 곡의 성격과 메시지에 따라 재배치되었다.


김홍기의 쇼팽 발라드 1번은 지금까지 들어온 다른 연주들처럼, 기획자의 설명처럼 따뜻하거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재현하지 않았다. c minor의 c음의 크고 중후한 울림으로 시작된 김홍기의 발라드 1번은 슈베르트의 독백보다 고독했다. 타자와의 주고 받는 교감이 느껴지지 않는 김홍기의 발라드는 하나의 ‘단자’(라이프니츠)였다. 외부와 독립된 존재, 어떤 외부 실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내적 원리에 의해 진행되는 ‘단자’였다. 앞에 제시된 프레이즈들의 관성에 의해 다음 부분들이 추동되었다. 1,2주제는 템포 및 다이나믹의 극단적 대비를 이루면서 이중성 및 양면성을 지닌 존재의 다양한 변주를 이어간다. 파치올리 피아노의 중후한 울림은 주 멜로디를 강렬하고 또렷하게 울렸고, 김홍기 피아니스트는 주멜로디 이외의 흐름들을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정적으로 흐르도록 잘 조절했다. 연인들의 격정적 로맨스가 아닌 나홀로 고독한 길찾기의 격정적 토로와 방황을 한 번에 쏟아 냈다.


모차르트 C Major K.330은 첫 곡의 마지막 음 c를 연결하되, 옥타브와 조성을 바꾸어 밝고 경괘한 흐름으로 피아노의 다른 세계로 청중을 이끌었다. 정박속에서도 강렬한 터치 및 아첼레란토 및 크레센도의 적절한 활용으로 흔히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코스모스의 세계가 아닌, 인간적인 면모의 1악장이다. 2악장은 서정적이고 감상적이지 않다. 그저 모차르트면 가졌을 과도하지 않는 내면적 독백, 고전주의다운 서정을 또 덤덤히 그리고 당당히 이어간다. 늘 듣던 기존의 연주들, 한음 한음 의미 과잉의 조심스럽고 고뇌 가득한 선율이 아니다. 낯설다. 그 낯섦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고, 곡을 듣는 과정을 답변을 탐색하는 시간이었다. 3악장에선 주선율이 또렷하다 못해 공격적일 정도로 강렬하다. ‘노래하는 알레그로’라는 모차르트 소나타의 특징을 잘 살린다. 하나의 곡에 다양한 목소리의 대화적인 연주이다.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이중창에서 보이는 면모이다. 이 또한 낯설었다.


해답을 찾기도 이전에 슈베르트 즉흥곡 D.899 No.3번이 이어 진다.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슬픔과 고독이 가득한 곡으로, 알려진 바 이 곡의 정전은 1987년 빈에서의 호로비츠 연주이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즉흥곡 전곡 연주도 무척 좋지만, G-flat Major는 호로비츠의 연주와 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김홍기의 슈베르트는 슈베르트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하게 했다. 주선율은 백조처럼 너무나 또렷하고 아름답게 프레이징을 이어갔으나, 아르페지오 반주는 물 아래 바쁜 백조의 다리 움직임을 숨기지 않고 여과없이 제시함으로써 상당히 역동적인 내면 및 무의식을 재현했다. 그리고 곡에 이어 역시 슈베르트 즉흥곡과 관계조 f-sharp minor 인 그라나도스 ‘고야스카스’ 중 4곡 ‘탄식, 또는 처녀와 나이팅게일’을 이어서 연주한다. 탄식이란 표현, 나이팅게일 울음의 재현 즉 ‘표현’과 ‘재현’이란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분열증적인 이중주의 곡을 정말 제대로 연주한다. B부분의 마지막 카덴차에 해당하는 표현은 버림받은 자의 처절한 탄식을 이어갔고, 몇 마리의 나이팅게일의 울음과 그 메아리의 음향까지 아름다운 음색으로 재현하였다.


이어서 오늘의 하일라이트, 서울 예술의 전당 IBK홀(5/16)과 부산 낙동 콘서트홀(5/23)에서 전곡 연주하기로 예정된 알베니즈 ‘이베리아’ 중 3곡(트리아나, 알바이신, 에리타냐)연주이다. 기타(푼데아토 주법)와 캐스터네츠 악기의 흐름과 복잡한 리듬의 파소-두블레, 텝의 리듬을 묘사한 자파테아도 리듬 등 다양한 리듬과 악기, 그리고 여러 음표 중 숨어있는 테트라코드 및 멜로디를 살려야 하는 극강 난이도의 ‘트리아나’이다. 김홍기 피아니스트는 트리아나를 물 흐르듯 유려하고 화려하게, 집시들의 춤 스텝이 청중의 눈에 보이듯 연주하여, 춤을 보았을 때의 알베니즈의 신명과 열정을 호흡하게 한다.
그라나다는 알함브라와 알바이신으로 나뉜다. 이 둘의 대비는 실로 극단적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화려하고 거대하며 웅장하다. 알고보면 패망과 약탈, 피와 한이 얼룩진 아름다움이지만,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은 비극을 훌륭하게 감춘다. 알바이신은 이슬람 거주지로 하얀 집들로 고즈넉한 곳이다. 김홍기가 연주하는 서주의 유니즌의 멜리스마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드뷔시가 말했듯 ‘눈을 감게’ 했다. 이 둘의 대비는 알바이신의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보는 알함브라 궁전의 일몰에서 합일을 형성한다. 이 일몰은 죽어도 잊지 못할, 그라나다의 압권이다. 카탈루나의 육신이나, 안달루시아에 영혼을 두었다는 알베니즈 역시 그라나다의 잊지 못할 추억을 호출하여 그의 걸작 ‘알바이신’ 속에 펼쳐 냈다. 김홍기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그라나다의 고즈넉한 적막과 알함브라 궁전의 화려함, 그 이후 장렬하게 소멸해가는 태양의 죽음을 잘 형상화한다.
‘에리타냐’는 첩첩히 싸인, 두텁지만 민첩한 화성과 꾸밈음속에 숨어 있는 멜로디, 복잡한 리듬을 쏟아 부은 곡이다. 김홍기 피아니스트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그 끝없는 재생을 시전한다. 풀 악셀을 밟아서 숨도 못 쉬게끔 몰아친 연주였다. 이후 앙코르로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2번을 점차 점강적으로 연주하면서 여운과 울림을 남기며 모든 연주를 마무리했다.


알베니즈 ‘이베리아’는 스페인 피아노 음악을 넘어서 전 인류의 보석과 같은 피아노 음악이다. ‘이베리아’는 그저 안달루시아를 비롯한 스페인의 풍경, 춤, 악기 등을 묘사한 음악이 아니다. 죽음을 앞둔 거장 알베니즈의 ‘백조의 노래’이자, 인생의 버킷 리스트이다. 알베니즈가 안달루시아를 여행한 것은 어린 시절 가출의 신화, 그리고 20대에 스페인에 머물던 아주 짧은 순간이다. 그렇지만 알베니즈는 그 순간의 충격과 추억을 평생 잊지 못하고 맘에 간직한다. 음악으로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을 다시 불러내며 삶을 정리한 깊이를 품은 곡이다. 악보만 봐도 입이 딱 벌어지는 최고의 난이도로 레코딩도 기피하는 곡인데, 알베니즈 ‘이베리아’ 전곡 연주를 탁월한 연주자의 실연으로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에 함께 한다는 것은 음악 애호가로서 기쁨이고 영광이다. 곧 서울과 부산에서 있을 전곡 연주를 행복하게 기대할 수 있게 한, 김홍기 피아니스트의 알베니즈 ‘이베리아’ 연주였다.


評 정해성(작곡가,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