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4월 28일(화)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모차르트 론도 K.485,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 31번, 알베니즈 스페인 모음곡 중 1, 2, 3, 4, 5, 8번, 그라나도스 고예스카스 중 탄식 또는 마하와 나이팅게일, 리스트 위로 2번, 베네치아와 나폴리 중 타란텔라, 앙코르 – 라라랜드, 쇼팽 마주르카 Op. 33 2번 Vivace
연주자, 스타, 엔터테이너… 클래식이라고 해봤자 별반 다르지 않다. 방식과 양식이 다를 뿐이지 연주자는 무대에 올라 대중들에게 자신을 선보이고 어필하며 그들의 갈채와 환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게 인간의 본연이다. 속세의 인기를 초월해 위대한 작곡가들이 남겨 놓은 작품에만 침잠하면서 그걸 재현하는데 오는 음악적 감동에만 묵묵히 뿌듯해한다면 방구석 피아니스트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이 애정하는 대상을 타인과 공유하며 거기서 인정과 공감을 받길 바라는 건 인간이라면 인지상정이다. 혼자서만 좋아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건 구도자요 도인이다. 가끔 이런 자들의 행보에 존경을 표하며 동조를 표하는 소수가 있긴 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사업을 못 한다. 그저 선의에 입각한 후원과 지원으로서만 운영될 건데 그런 동호회 소수의 마니아는 끼리끼리고 확장성이 없다. 그러니 클래식 연주자라고 해봤자 케이팝이나 트로트 등의 대중 연예인과 별반 차이가 없고 기질은 똑같다. 클래식이라고 덮어놓고 고상하고 귀족적이며 기품 있는 인품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요 인성과 연주는 별개인데 꼭 일체화에서 오는 팬덤이 문제다. 태생적으로 나약하고 의타적인 존재가 인간인지라 그러면서 위로와 자기만족을 얻으려고 하니 그걸 탓할수도 없겠지만……
그럼 랑랑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랑랑이나 유자 왕 등의 중국계 아티스트들의 클래식 음악 진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중국이 클래식 음악의 큰 시장으로 떠오른 지도 20년이 넘었다. 랑랑은 1982년생이니 진작 불혹을 넘었고 1987년생의 유자 왕도 40줄이 지척이니 외모나 패션, 경극 풍의 중국 캐릭터로 갑론을박을 벌일 나이가 진작 지났고 그들도 이제 더 이상 음악 외적인 가십거리로 언급되는 걸 싫어할 거다. 어찌 되었든 뜨기 전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으나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진정성과 연주력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어 할 건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랑랑이 <골드베르크>를 녹음하고 알베니즈의 <스페인 모음곡>을 레퍼토리로 삼는 건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정통 고전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1부의 모차르트 <론도>와 베토벤의 <비창>과 31번 소나타에서 가장 걸리적거린 건 뭉개짐과 과도한 발굴림이었다. <론도>에서는 맑고 명료하며 음악회 내내 랑랑의 성격을 규정한 섬세함의 집결이긴 하였으나 <비창>과 31번 소나타 3악장에서 나타난 거와 같은 뭉개짐이 빈번하게 일어나 언밸런스했다. 과장이야 랑랑 같은 이들의 전매특허니 굳이 재론하지 않더라도 한두 번도 아니요, 시종일관 발구르기는 주객전도이자 소리와 하체의 불균형이었다. 리스트나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도 아닌 베토벤에서 천지를 부숴버릴 듯이 천마군황보를 시전하니 그게 음악의 일부로 자연스레 섞이는 게 아닌 자기도취만 과시한 꼴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아이 같은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모차르트와 부합되어 음악 행위의 즐거움을 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맛보게 한다던가 묵직한 화음을 타건하고 페달을 ᄈᆞᆯ리 끊어 잔향을 억제하고 차단한다던가 그러면서 마치 베토벤 당시의 하프시코드를 연상시키는 듯한 <비창>은 신선했다. 같은 베토벤이었지만 31번에서는 음향을 다르게 처리하여 악기의 개발과 발전에 근접하는 원격에 근접하는 시도를 하였다. 31번 2악장에서 각 화음들을 천근추 마냥 무겁게 누르면서 각개격파 하더니 154마디의 피카디리 종지에서 페르마타로 F장3화음을 계속 퍼지게 놔두고 잔향이 사라질 때쯤 3악장 Bb단3화음의 5음인 F를 멀리서 들려오게끔 한 처리와 3악장 25마디 전주의 끝음인 Ab을 푸가 Db장조의 5음 개시로 전환 시키고 완전4도의 Db으로 이동시킨 점, 두 번째 푸가의 거울 역행으로 오른손의 D음을 아리아 끝의 G장3화음과 변환한 점 등은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눈앞에 펼쳐 보이게 만든 영롱한 탁월함이었다.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1부에 비해 알베니즈의 <스페인 모음곡>을 비롯한 2부는 압도적이었다. 알베니즈는 자국의 알리시아 데 라로차(Alicia de Larrocha) 정도가 정석으로 굳어졌고 알베니즈와 그라나도스 등의 스페인 피아노 음악의 전 세계에 보급되고 알려진 것도 그녀의 레코딩 덕이었다. 한정된 문헌과 레퍼런스 사이에 라로차가 스페인 피아노 음악의 근본이겠지만 반도라는 좁은 지정학적 위치를 떠나 타국의 해석자, 랑랑에 의해 재해석된 알베니즈였다. 강남의 귤이 회수를 넘어가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토양이 다르고 기후 풍토가 바뀌면 같은 생물학적 종이라도 해도 변용이 일어나는 게 세상사 당연한 이치인데 창조적 변용과 주체적 소화로서 랑랑의 알베니즈와 그라나도스는 우리네 백건우에 이은 상동성(Homology)이 빛난 시간이었다. 매혹적인 애수, 북구의 그리그와 쇼팽을 합해놓은 듯한 멜랑코리한 서정미가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면서 다가왔다. 이런 스페인의 고유 정서를 랑랑은 보편적인 세계인의 시각으로 바꿔 마치 한국의 K-Pop이 전 지구인의 마음을 강타한 것처럼 국제화시켰다. 세련되었다. 그 안에 호타를 비롯한 스페인의 전통 무곡 장단이 꿈틀대었지만 진하지 않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랑랑의 연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종로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파는 청국장이나 된장국이 무주구천동의 장독대에서 막 퍼 올려 끊인 시골밥상과는 다른 것처럼 그들도 필자처럼 우호적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스페인 음악에 대한 모욕이자 훼손이라 반발할까? <고예스카스 중 탄식 또는 마하와 나이팅게일>은 인상파 그림의 묘사라기보다 랑랑 내면의 깊은 고뇌와 철학이 묻어나 있었다. 아라비아 음계를 부각하면서 <아스투리아스>에서처럼 기타 주법의 적용이 명확하게 나타났다. 민속적 소재에 낭만주의적 색채감, 그리고 한국인을 부인으로 둔 글로벌라이징 하이브리드였다. 리스트부터는 앙코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기 피아노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라라랜드>까지 화려한 퍼포먼스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스타성 또는 광대 기질은 타고나는 건지….
평: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
사진 제공: 마스트미디어
2026년 4월 28일(화)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모차르트 론도 K.485,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 31번, 알베니즈 스페인 모음곡 중 1, 2, 3, 4, 5, 8번, 그라나도스 고예스카스 중 탄식 또는 마하와 나이팅게일, 리스트 위로 2번, 베네치아와 나폴리 중 타란텔라, 앙코르 – 라라랜드, 쇼팽 마주르카 Op. 33 2번 Vivace
연주자, 스타, 엔터테이너… 클래식이라고 해봤자 별반 다르지 않다. 방식과 양식이 다를 뿐이지 연주자는 무대에 올라 대중들에게 자신을 선보이고 어필하며 그들의 갈채와 환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게 인간의 본연이다. 속세의 인기를 초월해 위대한 작곡가들이 남겨 놓은 작품에만 침잠하면서 그걸 재현하는데 오는 음악적 감동에만 묵묵히 뿌듯해한다면 방구석 피아니스트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이 애정하는 대상을 타인과 공유하며 거기서 인정과 공감을 받길 바라는 건 인간이라면 인지상정이다. 혼자서만 좋아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면 그건 구도자요 도인이다. 가끔 이런 자들의 행보에 존경을 표하며 동조를 표하는 소수가 있긴 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사업을 못 한다. 그저 선의에 입각한 후원과 지원으로서만 운영될 건데 그런 동호회 소수의 마니아는 끼리끼리고 확장성이 없다. 그러니 클래식 연주자라고 해봤자 케이팝이나 트로트 등의 대중 연예인과 별반 차이가 없고 기질은 똑같다. 클래식이라고 덮어놓고 고상하고 귀족적이며 기품 있는 인품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요 인성과 연주는 별개인데 꼭 일체화에서 오는 팬덤이 문제다. 태생적으로 나약하고 의타적인 존재가 인간인지라 그러면서 위로와 자기만족을 얻으려고 하니 그걸 탓할수도 없겠지만……
그럼 랑랑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랑랑이나 유자 왕 등의 중국계 아티스트들의 클래식 음악 진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중국이 클래식 음악의 큰 시장으로 떠오른 지도 20년이 넘었다. 랑랑은 1982년생이니 진작 불혹을 넘었고 1987년생의 유자 왕도 40줄이 지척이니 외모나 패션, 경극 풍의 중국 캐릭터로 갑론을박을 벌일 나이가 진작 지났고 그들도 이제 더 이상 음악 외적인 가십거리로 언급되는 걸 싫어할 거다. 어찌 되었든 뜨기 전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으나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진정성과 연주력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싶어 할 건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랑랑이 <골드베르크>를 녹음하고 알베니즈의 <스페인 모음곡>을 레퍼토리로 삼는 건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정통 고전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1부의 모차르트 <론도>와 베토벤의 <비창>과 31번 소나타에서 가장 걸리적거린 건 뭉개짐과 과도한 발굴림이었다. <론도>에서는 맑고 명료하며 음악회 내내 랑랑의 성격을 규정한 섬세함의 집결이긴 하였으나 <비창>과 31번 소나타 3악장에서 나타난 거와 같은 뭉개짐이 빈번하게 일어나 언밸런스했다. 과장이야 랑랑 같은 이들의 전매특허니 굳이 재론하지 않더라도 한두 번도 아니요, 시종일관 발구르기는 주객전도이자 소리와 하체의 불균형이었다. 리스트나 프로코피예프 소나타도 아닌 베토벤에서 천지를 부숴버릴 듯이 천마군황보를 시전하니 그게 음악의 일부로 자연스레 섞이는 게 아닌 자기도취만 과시한 꼴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아이 같은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모차르트와 부합되어 음악 행위의 즐거움을 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맛보게 한다던가 묵직한 화음을 타건하고 페달을 ᄈᆞᆯ리 끊어 잔향을 억제하고 차단한다던가 그러면서 마치 베토벤 당시의 하프시코드를 연상시키는 듯한 <비창>은 신선했다. 같은 베토벤이었지만 31번에서는 음향을 다르게 처리하여 악기의 개발과 발전에 근접하는 원격에 근접하는 시도를 하였다. 31번 2악장에서 각 화음들을 천근추 마냥 무겁게 누르면서 각개격파 하더니 154마디의 피카디리 종지에서 페르마타로 F장3화음을 계속 퍼지게 놔두고 잔향이 사라질 때쯤 3악장 Bb단3화음의 5음인 F를 멀리서 들려오게끔 한 처리와 3악장 25마디 전주의 끝음인 Ab을 푸가 Db장조의 5음 개시로 전환 시키고 완전4도의 Db으로 이동시킨 점, 두 번째 푸가의 거울 역행으로 오른손의 D음을 아리아 끝의 G장3화음과 변환한 점 등은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눈앞에 펼쳐 보이게 만든 영롱한 탁월함이었다.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1부에 비해 알베니즈의 <스페인 모음곡>을 비롯한 2부는 압도적이었다. 알베니즈는 자국의 알리시아 데 라로차(Alicia de Larrocha) 정도가 정석으로 굳어졌고 알베니즈와 그라나도스 등의 스페인 피아노 음악의 전 세계에 보급되고 알려진 것도 그녀의 레코딩 덕이었다. 한정된 문헌과 레퍼런스 사이에 라로차가 스페인 피아노 음악의 근본이겠지만 반도라는 좁은 지정학적 위치를 떠나 타국의 해석자, 랑랑에 의해 재해석된 알베니즈였다. 강남의 귤이 회수를 넘어가면 탱자가 되는 것처럼 토양이 다르고 기후 풍토가 바뀌면 같은 생물학적 종이라도 해도 변용이 일어나는 게 세상사 당연한 이치인데 창조적 변용과 주체적 소화로서 랑랑의 알베니즈와 그라나도스는 우리네 백건우에 이은 상동성(Homology)이 빛난 시간이었다. 매혹적인 애수, 북구의 그리그와 쇼팽을 합해놓은 듯한 멜랑코리한 서정미가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면서 다가왔다. 이런 스페인의 고유 정서를 랑랑은 보편적인 세계인의 시각으로 바꿔 마치 한국의 K-Pop이 전 지구인의 마음을 강타한 것처럼 국제화시켰다. 세련되었다. 그 안에 호타를 비롯한 스페인의 전통 무곡 장단이 꿈틀대었지만 진하지 않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랑랑의 연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까? 종로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파는 청국장이나 된장국이 무주구천동의 장독대에서 막 퍼 올려 끊인 시골밥상과는 다른 것처럼 그들도 필자처럼 우호적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스페인 음악에 대한 모욕이자 훼손이라 반발할까? <고예스카스 중 탄식 또는 마하와 나이팅게일>은 인상파 그림의 묘사라기보다 랑랑 내면의 깊은 고뇌와 철학이 묻어나 있었다. 아라비아 음계를 부각하면서 <아스투리아스>에서처럼 기타 주법의 적용이 명확하게 나타났다. 민속적 소재에 낭만주의적 색채감, 그리고 한국인을 부인으로 둔 글로벌라이징 하이브리드였다. 리스트부터는 앙코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기 피아노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라라랜드>까지 화려한 퍼포먼스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스타성 또는 광대 기질은 타고나는 건지….
평: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
사진 제공: 마스트미디어